목록마케팅 (10)
마케터의 업무일지

1월 31일 새벽. 겨울 방학이 한창일 때,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디지털 마케터로서 그로스 마케팅 실무 강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주일간 매일 계속되는 강연이다 보니 전반적인 강연 개요는 이미 대학 측에 전달드렸었고, 강연 하루 전날 새벽엔 세부적인 강연 교안을 점검하면서 강연 계획서를 펼쳐놓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강연 계획서에서 몇 가지 키워드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 '취업 역량 강화와 실무 능력 향상을 위해' '이론만으로는 쌓을 수 없는 현장 실무 경험을 전달하고' 그렇다. 그냥 교육도 아니고 '실무 교육'이다. 이 점이 사실 난 꽤 부담스러웠다. 이론을 다투는 대학교 강의실에서 현장의 ‘실무’를 제대로 가르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현업의 정보와 경험 사례를 비밀 보장..

1월 19일 오전, 클라이언트를 앞에 두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제품은 계속 발전하고 매출은 늘고 있는데 수익은 전혀 늘지 않았어요." 여러 매출 지표들과 수익 구조, 비용이 빼곡히 적힌 스프레드 시트를 띄워놓은 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계산식이 잘못된 걸까? 지우고 다시 쓰기를 몇 번. 하지만 계산식은 정확했고, 결괏값은 그대로였으며, 정신은 또렷해졌다. 클라이언트는 매출액을 늘리는 데 골몰하느라 좋은 제품을 적당한 가격에 많이 팔면 될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매출도 눈에 띄게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현 상황에서 마케팅비와 판매량을 무작정 늘린다면 이 브랜드는 곧 망할 수도 있습니다.'라며 찬물을 끼얹어야 했다. 새로운 문제점을 정의하고, 생각을 바꾸고, 방향을 전환시켜야 했다...

10월 14일 오후,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12월 프로모션으로 시장에 눈도장을 찍고 싶은 브랜드 A와 CRM 마케팅을 통해 연말 감사제를 하고 싶은 브랜드 B가 있었다. 두 클라이언트 모두 궁극적으로 모든 고객을 일회적으로 대하지 않았고, 우리 상품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분들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단지 이 많은 사람들에게 모두 프로모션과 할인 혜택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조금 걱정이 될 뿐이었다. 브랜드를 전개해서 운영하는 데에는 '어떤 경로를 통해 유입되었을까?', '얼마를 구매했을까?'와 같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고객 확보 전략과 기존 고객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전략이 중요하다. 그런데 너무 많은 브랜드들이 모든 고객을 '똑같이' 대한다. 모든 사람에게 거의 같은 양..

11월 30일 오전. 다음 달 매체별 광고 집행 예산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효율은 원하는 만큼 어느 정도 나왔으나 광고비 규모 자체가 조금 부담이었던지, 클라이언트 측에서 집행 예산을 일시 하향 조정하길 원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인 점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담당자가 뭔가 주저하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어떤 일인지 궁금하여 물어보니 혹시나 광고 예산을 줄인 것이 광고 효율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하고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의외로 클라이언트 측에서 광고 예산의 규모와 광고 효율의 연관성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다는 사실이다. 처음 매체별 광고를 시작하게 되어 월 광고 예산을 논의할 때, 클라이언트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최대한 적은 예산을 투..

1월 3일 오후. 공들여 만든 기획안이었지만 설득에 실패했다. 미팅 당시 분위기나 반응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선 임기응변으로 기존 안을 살짝 비틀었고, 결과적으로는 잘 마무리되었지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돌이켜보니 왜 나에겐 뭔가 한 방이 없을까 하고 자책을 하곤 했던 것 같아 아쉬웠다. 그리고 초안에 대한 압박감이 심했다. 킥오프였지만 첫 단추를 잘 꿰려고 너무 앞서가다 보니 공들인 노력이 아쉬워 자꾸 기존 아이디어를 지키려고만 했다. 의미 없는 일이었다. 모든 괜찮은 아이디어도 초기에는 대부분 볼품없어 보인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성공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고, 굳이 해서는 안될 이유가 수십 가지는 되어 보인다. 하지만 초기의 무덤덤한 반응과 초안의 빈약함을 묵묵히 감수하면서 다음 단계로 ..

10월 27일 오전, 창의적으로 컨셉을 표현해보고 싶은데, 요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아서 고민이었다. 기존에 프랜차이즈를 많이 담당해 보긴 했었지만 새롭게 맡은 이번 외식업계 프로젝트는 판매 품목 자체도 낯선 분야였고, 클라이언트는 여러 사업을 해본 경험이 있어서 어떤 컨셉과 마케팅 전략이 먹히는지 보는 날카로운 눈이 있었다. 여러모로 신경이 많이 쓰였다. 답답한 마음에 여러 잘 디자인된 브랜드들이 모여있는 팝업스토어들과 동종 업계의 경쟁업체들을 살펴봤다. 엄청 유명하지 않은데도 웨이팅 줄이 길게 늘어선 걸 보고서는 놀라기도 했고, 트렌디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들과 독특한 맛과 마케팅 전략으로 명성을 얻는 곳이라면 나도 똑같이 디자인할 수 있다 생각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 프로젝트도 ..

2월 2일 오후. 새롭게 합을 맞춘 클라이언트와 첫 1개월 차 마케팅이 마무리되었고, 미팅을 하러 가는 차 안이었다. 이번 미팅은 매월 첫째 주마다 지난달의 광고 성과를 보고하고 후속 전략을 논의하는 자리. 대행 첫 달 후 미팅인 만큼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운전해 가면서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그려봤다. 성과는 어느 정도 좋은 편이었지만, 처음으로 데이터를 도입해서 분석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자리였기에 괜히 긴장되고 마음이 불편했다. 우당탕탕 미팅을 마치고 난 후, 진행 결과는 긍정적이어서 미팅은 잘 마무리되었지만 대화는 생각보다 난항이었다. 세상의 모든 변화들이 처음에는 낯설듯이, 오감과 경험만을 사용해 결정을 내리고 지름길을 찾는 것에 익숙한 환경 속에서 데이터를 들이미는 것은 언제나 불편..

9월 3일 오전, 벌써 몇 달 전 일이다. 하루는 몇 년 전부터 운영해 온 브랜드가 제법 매출도 나오고 잘 나간다는 클라이언트와 미팅을 가졌다. 창업 후 생존을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그러자 매출 규모도 커지고 구성원들의 수도 늘어나서 이제는 브랜드의 비전과 핵심 가치 등을 고민하는 단계였다. 몇 차례 고민 끝에 클라이언트는 브랜드의 방향을 확실하게 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나는 본격적으로 마케팅 전략 수립에 착수했다. 항상 해왔던 대로 가장 먼저 어디서 어떻게 해당 브랜드와 관련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지부터 점검했다. 내가 모을 수 있는 데이터와 그 데이터의 접근 방법을 확보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번 클라이언트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의사 결정을 하고 성과를 내려는 의지가 ..

12월 7일 오전. 광고 영상 촬영을 들어가려는 데 자주 듣던 하소연을 또다시 들었다. "갑자기 저희 대표님이 브랜드 홍보 영상 하나 만들어보라고 맡겨 주셨는데, 컨셉을 못 잡겠어요. 이번이 예산 배정 받은 걸로 만들려고 하는데, 기본적인 틀이나 방식을 몰라서 제작 의뢰도 못하겠네요." 우리 회사의 광고 영상 제작 담당자로서, 각 잡고 앉아서 브랜드 홍보 영상을 제작하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멍해진다. 의욕을 갖고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레퍼런스 영상만 찾아보기 시작한다. 광고 대행사나 프로덕션에 제작 의뢰를 하려니 기본적인 틀과 컨셉이 없어서, 미팅을 해도 추상적인 설명만 답답하게 오고 가고 '~~한 느낌'이라는 말만 맴돈다. 이렇게 쉽지 않은 이유는 촬영을 준비하는 사전 제작 단계의 경험..

12월 13일 오후, 열심히 제작한 영상의 시사회를 잘 마치고 식사를 하던 중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 편의 컨셉과 메세지는 기획이 확실히 잡혀서 영상도 잘 뽑힌 것 같은데, 후속 편은 더 적은 인원과 시간, 비용으로도 충분히 비슷하게 제작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이야기였다. 극소수의 내부 인원만으로. 제작 예산의 한계를 나도 알고 있었기에, 함께 응원하겠다는 말을 덧붙이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문득 궁금했다. 매력적인 후킹으로 쉽게 흥미가 생기고 시청이 술술 되는 영상 콘텐츠라면 그만큼 더 많은 노력과 사전 연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말씀하셨을까? 단순히 영상을 즐기고 보는 사람들은 어떤 콘텐츠든 자유롭게 느끼고 표현하면 된다. 깔끔한 영상의 군더더기 없는 스토리나 내용 로직은 수많은 고민 ..